우리는 서양 역사에 대한 이질감을 많이 지니고 있으면서 공부를 위한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외우기에 급급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역사이야기들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건 다를게 없다는걸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이 외우던 세계 최초의 성문헌법인 함무라비 법전은 모두가 알 것입니다. 하지만 그 법전을 언제 누가 만들었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함부라비 법전에는 여성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노예도 돈이 있으면 자유를 살 수 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런 큰 역사적 사건 이면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투탕카멘 왕의 동상과 함께 그의 미라를 연구하던 하워드 카터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1922년 11월 26일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협력자인 카너번과 함게 고고학사상 가장 놀라운 발굴을 했습니다.
서양의 역사 속 숨겨진 이야기들
1. 투탕카멘 왕의 무덤을 발굴한 하워드 카터 미라의 저주로 죽었을까요
1922년 투탕카멘 왕의 무덤을 발굴한 하워드 카터, 그는 그의 협력자와 함께 고고학사상 어마어마한 발견을 한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무덤에서 발견한 상형문자의 점토판에는 이런 문자가 새겨져 있다 "파라오의 평안을 교란시키는 자는 모두 죽으리라" 이 문자가 해독된 후 다음해 4월 협력자였던 사람이 죽고 이어서 사망 원인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이후 1929년까지 왕의 무덤을 파해치는데 관련되었던 22명이라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하워드 카터는 이후 1939년에 죽었고 그 무덤에서 나온 보물들의 목록을 기록했던 베렐이라는 사람은 49세에 알 수 없는 자살을 했습니다. 이후에도 관련자들의 죽음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1966년 무덤에서 나온 보물들을 파리로 보내기로 동의한 이집트 관리가 회의를 끝내고 오다가 자동차 사고로 죽고 이어서 무덤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이 복막염으로 죽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이어진다. 어떤이는 동굴 발굴때 걸렸던 감기가 악화되어 죽은 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투탕카멘왕의 저주가 아닌 무덤 속 과일이나 야채들 속 곰팡이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2. 수세식 화장실이 처음 생겨난건 언제였을까요
놀랍게도 변기 위쪽으로 물탱크가 달린 수세식 화장실이 처음 나온 건 기원전 3000년경 그리스가 시초였다고 합니다. 물탱크의 물은 빗물을 받아서 사용했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길어서 물을 채웠다고 합니다. 이후 로마는 기원전 27년경 이미 각 가정마다 수세식 화장실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기원후 70년쯤에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이미 대리석 소변기들도 보였습니다. 이것이 공중화장실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고대 로마의 황제로 네로의 자살 이후 황제로 추대되어 국가재정을 바로세우고 부정부패를 많이 몰아내었습니다. 또한 공공화장실 등 공공 건물을 짓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아 로마 건축물 중에 손꼽히는 걸작인 콜로세움을 건설하였습니다. 영국에서는 1851년 대 박람회 행사를 게기로 비로소 공중화장실이 등장을 했습니다. 그당시 화장실 사용료가 2펜스였는데 박람회가 열리는 동안 올린 화장실 수입이 2,470파운드나 되었다고 합니다.
3. 로마 시대 의사들은 초창기 왜 노예들로 구성되어있었을까요
로마인들이 믿는 신은 무척 많았습니다. 하물며 그들은 반은 사람, 반은 신인 반인반신도 신으로 인정을 하고 섬기기도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반인반신들이 병과 많은 관련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병이나면 치료해 달라고 의식을 행하며 빌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낫지 않으면 다른 종류의 반인반신을 찾아 빌기도 하고 혹은 자신들이 의식을 잘못 치뤄서 낫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습니다. 이후 로마는 더욱 발전하면서 의사들이 생겨났지만 로마인들은 사람이 신을 대신해서 의술을 하는 행위가 시민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여기며 의술을 행하는 일을 격하시켰고 결국 노예들이 의사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4. 로마의 황제 네로가 어머니를 죽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네로는 폭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초기에는 선정을 펼쳤습니다. 아마도 기독교들을 박해한 이유로 더욱 폭군으로 알려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 네로가 어머니를 죽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두번재 부인입니다. 아그리피나는 이미 결혼을 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의 아들 네로가 있었습니다. 또한 황제에게도 브리타니쿠스라는 아들이 있었고 모두들 그를 후계자로 내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네로의 어머니가 브리타니쿠스를 자리에서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 네로를 즉위시켰습니다. 이후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나라의 정책에 관하여 많은 부분 자신이 관여를 했으며 심지어 화페에도 자신의 초상을 그려넣도록 하였습니다. 네로는 그런 어머니가 싫어져 자주 마찰이 생기고 그러다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황제의 아들이었던 브리타니쿠스를 다시 황제로 즉위시키려다 실패합니다. 이후 네로는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고 어머니는 심하게 반대를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속에서는 결혼을 할 수 없었던 당시의 풍습이 있었는데 네로는 이때 어머니를 죽이고 친구의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결혼하게됩니다.
십자군 전쟁은 1071년 셀주크 왕조가 시리아 지방을 차지하고 예루살렘 순례를 하려 하는데 기독교인들의 성지라고 그걸 막은데서 동기가 되었습니다. 유럽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성지를 무슬림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명분하에 전쟁을 일으키고 이때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하고 참가를 했기때문에 '십자군' 이라고 불린데서 유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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